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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굿-즈의 조건들

번역가 윤원화의 질문과 굿-즈 관계자들의 답변으로 이루어지는 토크 굿-즈가 만들어진 현재의 배경/조건들에 대하여

- 일시 : 2015년 10월 17일 토요일 19:00~21:00
- 장소 : 세종문화회관 예인홀

- 진행 : 윤원화
- 녹음 제공 : 김익현
- 속기록 제공 : 인현우
- 녹취 : 송민정, 김익현, 이수경, 강정석
- 편집 : 강정석, 이수경, 윤원화, 윤율리

* 녹음 파일의 음질이 좋지 않아 잘 들리지 않는 부분에는 (잘 들리지 않음)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윤율리 : 굿-즈(goods)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오프닝 토크랑 다르게 이번에는 좀 더 넓은 관점에서 굿-즈라는 게 만들어진 사회적 조건들 혹은 어떤 세대적인 조건들 이런 이야기들을 좀 나누어 보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윤원화 선생님이 자리에 계시고요. 아마 저희를 대상으로 청문회 하듯이 질문을 던져주실 거예요. 지금 저희는 애정 순으로 좀 앉아봤는데···ㅎㅎ. 네···. 최애캐는 호상근 님이시고요. 호상근 님은 굿-즈 기획팀은 아니신데 참여 작가 중 한 분으로서 참여를 해주시고 계세요. 여기 돈선필 작가님, 김영수 작가님, 강정석 작가님 그리고 저(윤율리)는 굿-즈 기획팀의 일원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아무튼 이후의 진행을 윤원화 선생님께서 부탁드립니다.

윤원화 : 안녕하세요. <Q&A, 굿-즈의 조건들>을 진행하게 된 윤원화라고 합니다. 내일 하루가 더 남기는 했지만 오늘은 굿-즈의 마지막 밤입니다. 굉장히 이상했던 시간이 끝나가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걱정도 많이 하고 기대도 많이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즐거운 자리가 되었고 그 시간을 일부나마 소비자로서 그리고 토크 진행하는 사람으로서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들 정말 수고하셨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가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하는데 지난 몇 년 동안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그래서 뭔가 선택을 할 때 머리로 이해하고 판단한다기보다는 뭐랄까 뱃속의 느낌대로 움직여야 하는 경우들이 되게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야겠다든가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든가 하는 그런 결정들이 뭔가 이렇게 딱 이유를 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신속하게 판단이 돼요. 일단은 맞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맹목적인 판단이죠. 이것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르는데 어쨌든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고 이럴 수밖에 없었다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기도 해요.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나는 선택을 한 거죠. 주어진 조건들이 있었는데 거기서 내가 뭔가를 봤거나 보지 못했거나 어쨌든 간에 마음을 정하게 돼요. 굿-즈도 그런 여러 가지 조건들 그리고 선택들이 축적된 결과였던 것 같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 이런저런 여러 갈래 길들을 통과하면서 결과적으로 하나의 다발로 묶이고 하나의 결절점을 이룬 게 결과적으로 지금 요 며칠간의 굿-즈가 되지 않았나 하는 거죠.
그런 맥락에서, 굿-즈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들어졌는지는 지난 수요일의 오프닝 토크에서 여기 계신 운영진분들께서 직접 이야기해 주셨으니까요. 오늘 토크는 조금 더 멀리서, 개인들의 구체적인 각자의 시간을 끌어와서 되짚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굿-즈를 만든 사람들의 세대적인 공통 조건들에 대해서는 우리 토크 말고도 굿-즈 홈페이지에 가 보면 대략 설명이 되어있어요. 그렇지만 오늘 여기서 제가 끌어내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들이에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경험을 한 것도 아니고 똑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어떤 갈래의 길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거기서 결과적으로 무엇을 하게 되었다는 것 외에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던 것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할 수 없었던 것들, 뭔가 착각을 했던 것들, 예감했던 것들,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던 것들, 선택한 것들하고 선택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이야기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그 모든 조건과 선택들의 결과로서 이른바 신생 공간들이 있었고 또 지금 여기에 굿-즈가 있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 행사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굿-즈가 무엇을 보여주었다고 느끼는지, 그리고 여기서 다시 어떤 선택이 가능할지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 시간 안에 끝내고 싶은데 솔직히 자신이 없기는 합니다. 최대한 간결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볼게요.
시간순으로 생각해 봤을 때, 제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은 지점은 일단 2000년대 후반입니다. 대부분 여기 계신 분들은 2000년대 후반, 그러니까 이명박, 오세훈, 유인촌 체제에서 대학을 다니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이때 당시의 미술계 분위기나 학교 분위기는 지금 하고 많이 달랐습니다. 제 기억으로 2006년에서 2008년까지의 시간 그리고 2009년에서 2011년까지의 시간은 굉장히 달라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은 매해가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10년 정도의 시간을 어떤 식으로 경험하고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그때의 뭔가가 기억이 있느냐 아니면 아예 없느냐에 따라서도 지금 현재 2015년에서 내가 뭘 해야겠다는 판단들이 달라진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게 어느 정도는 되게 세밀하게 세대 간 차이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 시간을 어디에서 어떻게 경험했느냐에 따라서 세대 내에서도 각자의 작업하는 방식이라든지 활동하는 방식에서 편차를 만드는 것 같거든요. 지금 여기에 제가 모셔달라고 부탁드린 분들도 마찬가지고요.
일단은 호상근 씨하고 윤율리 씨한테 질문을 드릴게요. 아까 호상근 님은 운영진이 아닌데 왜 불렀냐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말하자면···. 어르신 대표로서 모신 것입니다 ㅎㅎ. 2008년 이전에 활동하신 분들이 별로 없거든요. 근데 호상근 작가는 2008년에 박길종 씨, 김청진 씨 등하고 <포스트잇>이라는 프로젝트 그룹 활동을 하면서 그때 당시 구버전의 인사미술공간이나 제로원디자인센터 같은 뭐랄까 대안적인 제도랄까···. 제도 내의 대안이랄까···. 그런 공간들에서 직접 활동을 하셨어요. 그리고 윤율리 씨 같은 경우에는 2007년부터 아카이브 봄 공간이 만들어지고 돌아가는 데 관여를 하셨고요. 이게 길게 이야기하면 너무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일단은 어떻게 해서 그런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때 시간이 어땠다는 것을 좀 간단하게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먼저 호상근 작가님.

호상근 : 안녕하세요. 저는 호상근이고요. 박길종하고 김청진하고 (잘 들리지 않음) 너무 떨리네요. <포스트잇>이라고 해서 뭔가 해보자. 그때 굉장히 군대 제대하고 얼마 안 된 상태였고 (잘 들리지 않음) 다들 그림만 그리고 뭔가 그랬었어요. 제가 생각하는 2008년도 (잘 들리지 않음) 다 그림만 그리고 있었어요. 저도 그리고 있었고. 뭔가 다른 걸 해 보고 싶었고.… 많이 다 다르긴 다르고요. 그때는 그래도 뭔가···. 뭔가···. 저희가 하고 인미공이 없어졌거든요. 저희가 항상 바로 그전에 계셨던 선생님들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뭐 저희가···. 정말 뭐···. 우리 때문에 망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분들도 많았었고···.

(일동 웃음)

윤율리 : 아 네 저희가 며칠 강행군으로 지금 정신이 좀 없네요. 어 아까 윤원화 선생님 말씀처럼 그때 당시엔 저희가 뭘 하고 있는지 사실 잘 몰랐던 것 같고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주어진 조건 속에서 뭔가를 하다 보니까 계속하게 되는, 그런 흐름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런데 약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아보게 되면 그 시절의 풍경이 조금 더 명확하게 보이게 되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이걸 꼭 세대 이야기다 라고 말할 순 없는데 제 주변부의 풍경이라는 단서를 조금 달자면, 제일 눈에 띄게 기억이 나는 것은 어떤 일인 미디어 같은 것들이에요. 싸이월드를 굉장히 열심히 했었고 도토리 사서 음악을 발라 취향을 자랑하는 것이 중요한 어떤 하루의 일과였고, 공유와 블로깅이 굉장히 쉬웠다는 것이요. 클릭 몇 번으로 자기 타임라인을 구성하게 됐던 거죠. 그런 변화들, 싸이월드 클럽들이 막 생기고 음 소위 말하는 취향 공동체 같은 것들이 생기고, 그런 게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이 갖는 모습들을 분명히 변화시켰던 것 같은데요. 아카이브 봄처럼 소위 창작 작업을 하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모여서 작업실을 공유하고 오픈 스튜디오를 하고 하우스 파티 형식으로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서 만나고 하는 어떤 일들이 어 주변에 생각보다 굉장히 흔했어요. 모두의 이야기라고는 못하겠지만 예를···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부끄러운데요. 뭐 스트릿 패션 잡지가 막 생기기도 하고 ㅎㅎ. 그런 애들이 강남으로 몰려가서 다시 <데일리 프로젝트>라던가 그런 거점이 생기기도 하고. 그렇게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헤쳐모여의 속도가 굉장히 빨라지게 된 시점? 저는 그때를 생각하면 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카이브 봄도 그 흐름의 하나였던 것 같고, 다만 아카이브 봄은 어떤 우연적인 이유들로 인해서 지금까지 생존해 있고요. 다른 커뮤니티나 공간은 그렇지 않은 곳도 많죠. 호상근 작가님이 참여하셨던 <포스트잇> 같은 프로젝트들도 동일 선상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윤원화 : 그러면 아카이브 봄이 어떤 성격의 공간이라는 생각은 처음에는 별로 안 했던 거죠?

윤율리 : 일단 저는 미대를 나온 사람도 아니고. 그런데 뭐 그런 부분 자체가 느슨하고 무의미해지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디자이너들이 갤러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시간이기도 했고, 건축이나 다른 장르로 시야를 확장해 봐도 비슷한 풍경들이 펼쳐졌어요. 아카이브 봄도 알게 모르게 소용돌이의 흐름 끝에 걸쳐 있지 않았나···미술 공간이란 정체성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이 지금 뭐 광주(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도 가 있고 작가로서도 활동하고 있어요.

윤원화 : 그럼 지금 신생공간들이 와글와글 일어나는 것하고 비교했을 때, 현상적으로는 비슷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여지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한 번 이사를 하긴 했지만 그동안 쭉 같은 공간을 지켜온 입장에서, 어떤 점은 차이가 있다거나 어떤 점은 변하지 않고 지속하고 있는 것 같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윤율리 : 어떤 점에서는 물론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을 수 있겠는데 어···우선 아카이브 봄이 처음 시작될 때 소위 지금의 SNS 매체에 기대는 면이 크지 않았어요. 주로 오프라인의 모임이나 파티나 그런 활동들이 더 중심이 되던 때고요. 지금 신생공간이라고 일컫는 공간들은 윤원화 선생님께서 호상근 작가의 작업을 역으로 추적하신 것처럼 당시에 어떤 단서들을 가지고 흩어져 있었다는 생각을 저는 하거든요. 그게 여러 갈래 안에서 벌어져 나와 지금 신생공간이라는 형태로 미술계 안에서는 가시화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거는 좀 복잡한 문제지만요 ㅎㅎ.

윤원화 : 알겠습니다. 저는 2009년 2008년 2007년 그때랑 지금 상태를 비교했을 때 제일 다른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는 현장이 일테면 미대 졸업전인 것 같아요. 사실 굿-즈 오픈하기 며칠 전에 사람들이 일하면서 살살 미쳐가는 것을 보면서 아 되게 졸업전 준비위원회 같다, 그런 생각도 했었는데요···ㅎㅎ. 2009년 이전에 졸업전이라고 하면 상업화랑에서 작가 픽업을 하러 오기도 하고 졸업생들이 그런 기회를 위해 명함을 찍기도 하고, 2008년부터 아시아프가 시작되면서 대학 다니고 있거나 갓 졸업한 젊은 미술가들을 시장으로 바로 빨아들이려는 움직임이 활발했어요. 한국에서 상업화랑이 젊은 작가들을 전속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었는데도 그게 순식간에 너무 당연해져서, 그게 성공의 척도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도 있었죠. 그런데 이게 2009년부터 싹 사라지거든요. 지금 여기 계신 분 중에 호상근 작가하고 김영수 작가가 각각 2009년하고 2010년에 회화 전공으로 학부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을 하셨어요. 일단은 그 무렵에 각자 자기가 경험했던 졸업전 분위기랄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조금 들어봤으면 좋겠는데요.

호상근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다 아시다시피 ㅎㅎ. 진짜 다 그림만 그렸어요. 그러니까 아라리오의 전속 작가 이야기가 나오고 그런 거에 한창 붕붕 떠가지고, 다들 그림을 그리면 되는구나. 다들 그때 유독 벽에다 그림만 거는 분위기고 그랬거든요. 저도 포함해서. 그때 저도 그 흐름에 동참해서 했을 때, 나중에 느끼는 게 많았어요.

윤원화 : 무엇을 느껴요?

호상근 : 어 이게 큰 그림은 안 되겠구나

(일동 웃음)

호상근 : 그래서 다 뭐 그거 똑같은 거 하면은 (잘 들리지 않음)

(일동 웃음)

김영수 : 네. 어떻게 수습해야할 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제가 느꼈던 것은 조금 다른 거 같아요. 상근이 보다 조금 늦게 졸업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1년 차이에 어떤 그런 것들이 조금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상근이가 졸업하고 그 인미공에서 전시했던 게 마지막이었거든요. 그전에는 <열>전展이 있었고 인미공에. 그러니까 <열>전이 없어지고 그다음 상근이가 했던 그 프로젝트라는 말이죠. 사실상 내용은 거의 똑같아요. <열>전이 했었던 거랑.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그즈음 쌈지가 문을 닫았고. 그리고 청담 사거리 네이처포엠 건물에 갤러리가 그득하긴 했으나 한둘씩 죽어가고 있었고. 그리고 물론 저기 신사동 현대가 그때 있었고. 졸업하는 친구들 데려다가 전시를 하고. 뭐 이런 일들. 물론 가나에서도 그런 일을 했지만. 원래 졸업하면 좀 세기말 아닌가요? ㅎㅎ. 뭐 호화스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 지금이나 그때나 비슷할 것 같은데 저는 그냥 세기말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뭐 당시에 제가 상황이 안 좋아서 더 그랬을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다들 비슷하게 조금 울상이었던 것 같고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비슷한 상황이지 않으냐고 생각이 드네요.

윤원화 : 2010년이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을 때겠죠.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못하고, 요즘 날씨가 궂다는 느낌으로, 뭔가 이상하다 정도의 분위기였죠. 근데 어쨌든, 그때는 이를테면 두 분 다 계속 페인터로서, 대학원을 들어가신다고 하실 때는 계속 화가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을 하셨던 건가요?

김영수 : 아, 저 대학원 다니고 있는데요. 저 페인팅한 적이 사실은 없어서. ㅎㅎ

윤원화 : 평면 전공 아니세요?

김영수 : 평면 전공인데요. 제가 보드게임을 만들고 있거든요. 보드가 평면이지 않습니까? 평면 전공을 잘 몰라서 그리로 들어간 바람에. 과를 잘못 정해서. 잘 몰라서···.

윤원화 : 알겠습니다. 호상근 작가님은?

호상근 : 저는 계속 그림을 그릴 거라고 생각은 했었어요.

윤원화 : 그때 당시에는 이른바 대안공간이라고 하는 것과 상업화랑에서 활동하는 게 서로 다르다거나 공간에 차이가 있다거나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있었나요? 전시를 어디서 한다고 할 때, 상업에서 하면 이렇고 아니면 비영리, 대안공간에서는 또 다르고 뭐 그런···.

호상근 : 대안공간에서 하면 뭔가 멋있다는 느낌이 항상 있었고. 상업화랑···.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상업화랑에서 하면 "어, 축하해." 하면서 뒤에서는 (잘 들리지 않음)

윤원화 : 알겠습니다. ㅎㅎ

호상근 : 저한테 무슨 기대를 하고 계신 건 아닐 거라고 생각을 하고 지금 말씀드린 거예요 ㅎㅎ.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윤원화 : 자 이제 정리를 해볼게요. 2009년에는 미술 제도에 진입하는 어떤 등용문들이 하나씩 닫히고 있었어요. 쌈지가 문을 닫고 인미공도 문을 닫고. 그다음에 상업화랑들도 졸업전에 발길을 끊고요. 아트스펙트럼이 중단되고. 그러면서 원래 전시공간이 아니었던 좀 이상한 공간들이 미술과 관련된 이벤트의 무대가 됩니다. 이를테면, 2009년에 옥인아파트가 있었고 보안여관이 있었고. 지금 이제 국립현대 서울관이 된 기무사 건물이 있었고. 공간 해밀턴이 있었고요. 2010년에는 두리반이 있었고 이태원에 꿀이 문을 열고요. 이런 공간들은 미술 비슷한 것을 하는 경우라도 폐허 같은 것들이 많았고, 두리반이나 옥인 같은 경우는 애초에 그런 공간조차 아니었죠. 근데 이때쯤부터 사실상 ‘대안공간’이라는 말이 사어가 됩니다. 그래서 해밀턴은 웹사이트에 자기들은 대안공간이 아니고 그런 모든 명명을 거부한다는 말을 했었고, 꿀은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이름을 썼죠. 그때 당시엔 최정화 작가가 옛날에 만들었던 공간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2010년대에는 새로 개관하는 미술관들이 대부분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하게 됩니다. 그리고 꿀이 개관하고 꿀풀이 생기면서 풀도 대안공간에서 아트스페이스로 이름을 바꿨고요. 이 시기는 서울도 그렇고 미술 제도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굉장히 과도기였어요. 한편으로는 금융위기 이후에 뭔가 위태위태하니까 강남 재개발을 쫙 풀어 주면서 부동산이 진짜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려고 하고···. 그러면서 포이동 같은 강남 빈민촌들이 이슈가 되기도 했고요. 그리고 강북 뉴타운이 망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태로, 온 서울이 퇴거하고 철거하고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남대문에 불이 났었고 용산에 불이 났었고 그 와중에 2010년 디자인 수도 서울도 하고 있었고요. 침체된 분위기는 아니었거든요? 근데 뭐랄까···. 이상한 말이지만 화전민들이 숲에 불을 지른 다음에 불이 역류하면 막 도망을 가는 것 같은 그런 되게 이상한 열기가 있었어요. 어쨌든 이건 제 기억이고, 여기 계신 분들은 대개 이쯤에 졸업을 준비하거나 졸업을 하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대학원에 다니기 시작하거나···. 개인사적으로도 굉장히 과도기였을 텐데요. 강정석 씨는 2011년에 대학을 졸업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졸업전을 하기에는 정말 안 좋은 시기였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ㅎㅎ. 졸업전 작업은 뭘 했었고 그때 분위기는 어땠나요?

강정석 : 졸업 전 분위기가 어땠냐고 하면, 저는 좀···. 주관적인 경험이 큰 것 같아요. 저희 졸준위원장이 야간산행에 빠져서 전시 직전에 졸전을 포기했고, 그 때문에 담당 교수님이 화가 났다고 들었고 홍보에도 지장이 생겨 사람이 적게 왔습니다. 굉장히 우울한 상황이었습니다. 학교 전시장이 겨울이라 영하인데 난로가 지킴이용 정도였어요. 근데 학생들은 많은 이들이 영상을 하고 있었단 말이죠. 영상을 다 10~20분씩 해놨는데 추우니까 아무도 안 보는 거예요. 졸업 전 하기에 안 좋은 시기였다는 말을 제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좋은 시기를 본 적은 없기 때문에. 졸업 전 하는 것 자체는 추운 겨울에 언제나 안 좋은 시기고···. 저 졸업 시기 이전 이후도 마찬가지로, 학교 졸업 후의 선택지는 아마도 없었다고 생각해요. 작업실 비용보다 석사가 싸게 먹히니, 바로 진학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저는 졸업해서 바로 잠깐 일을 했었는데, 계산 때려봤을 때, '아, 내가 미술을 못 할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졸업 전시는 2013년의 개인전에 발표한 작업과 거의 겹쳐요. 11년 졸업이니 한동안 작업을 거의 안 한 거죠. 아이폰이 나와서 완전히 빠져서 그것만 갖고 놀았어요. 어플을 굉장히 많이 샀어요. 사이트 같은 거 보면서 재밌다고 하는 앱들을 다운받아서 다 해보는 거예요. 괜히 이유 없이 리모트로 컴퓨터 조작할 수 있는걸 해서 이유 없이 집에서도 핸드폰으로 리모트 해서 컴퓨터를 하고 그랬어요.

윤원화 : 알겠습니다. 지금 아이폰 이야기를 하셨는데, 돈선필 작가한테 질문 하나만 드리고 아이폰 이야기로 넘어가죠. 제가 다른 분들은 CV를 다 알아내는 데 성공했는데, 솔직히 돈선필 작가는 못 찾았어요. 근데 선필 씨에 관해서는 올해 초에 상상마당에서 산업대 전시가 있었는데 거기서 우아름 씨가 작가론을 써주셨어요. 거기 보면, "돈선필의 작업과정은 2010년 작 <나의 힘>에서 시작한다. 상대방을 향해 활짝 웃는 이모티콘을 커다란 캔버스 프레임에 옮겨놓은 평면 작업과 이 이모티콘을 작가에게 전송했던 누군가에 대한 인상을 기록한 글로 된 드로잉이 한 세트를 이루는 작업."이라고 하는데요. 이제 이걸 만들고 이제 '아, 이게 첫 작업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그때 다른 작업은 어떤 걸 하고 있었어요?

돈선필 : 아···. 제가 일단 CV가 없는 것은 제대로 된 작가 활동을 하지 않아서 ㅎㅎ. 그래서고요. 그리고 저는 어쩌다 이 자리에서 제 작업 프리젠테이션을 하게 되었는지. ㅎㅎ. 음···. 일단 제가 관심 가졌던 부분은···. 서로 대화를 하거나 사람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을 취하는 게 어떤 형태를 가지게 되는 순간 같은 거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학부 때 다양한 작업을 하는데,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설치도 하고 그러는데, 저 작업을 하고 나서. '아, 이게 앞으로 작업의 어떤 시발점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해서 그때 아름 씨랑 이야기할 때, 그런 걸 전달했었고. 다른 작업은 제가 오타쿠 기질이 있어서 피규어나 장난감 같은 형태를 몹시 좋아하는데, 그런 형태가 있는 조각···. 이라기보다는 오브제나 어떤 피규어에 가까운 것들을 제작하고 만드는 그런 작업을 해왔습니다.

강정석 : 잠깐 기억이 나는 게 있는데요. 한예종 경우 2010년엔 졸업하자마자 어디 어디에서 개인전했다 하는 소리가 꽤 들렸어요. 그때 졸업한 사람들은 3학년 때에 아시아프 생기고 하면서 뭔가 탄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런 영향인지, 2011년 졸업예정 학생끼리 맨날 전략에 대해서···. 수업시간에 크리틱하고 그러면, 서로 전략이란 단어로 이야기를 했어요. 한번은 수업 중에 강사님이 굉장히 화를 내신 적이 있거든요. 작가가 맞냐고. 왜 자꾸 전략 이야기를 하느냐고. 졸업 후에 활동이 그려지지 않으니 그랬던 거 같아요.

윤원화 : 어떻게 보면 2009년 2010년 넘어가면서 어떤 부분이 꼬이기 시작해요. 분명히. 뭔가가 망가졌어요. 뭐가 어떻게 어디서부터 망가졌다고 말하긴 힘들지만, 망가진 부분이 있어요. 그러면서 젊은 미술가들이 미술을 한다고 했을 때, 그게 제도에서 정의되는 미술의 게임 혹은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망연해지는 순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거길 비집고 들어오는 게, 예를 들면, 아이폰이나 인터넷으로 접근 가능한 미술 외적인, 넓은 의미에서 서브컬쳐가 아녔나 싶은데요. 그러니까 1990년대 2000년대에 대중문화라고 부르던 것들하고는 조금 다른 콘텐츠가 조금 다른 채널로 들어오면서, 그게 미술 전공하는 학생들한테 끼친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2009년은 아이폰이 국내 출시된 해이기도 합니다. 전시 정보가 스마트폰과 SNS로 확산이 되면서 공간들이 관객들한테 가시화되는 방식이나 미술 이벤트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가 변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간간이 하고 있는데요. 일단은 율리씨한테 질문을 드립니다. 어쨌든 공간을 계속 운영하고 계셨으니까. 이를테면 아카이브 봄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시잖아요? 그걸 언제 처음 만드셨어요?

윤율리 : 사실 올해 만들었고요 ㅎㅎ. 죄송합니다. 올해 만들었고요. 제가 길을 잘 못 찾는데 아이폰을 2012년엔가 샀거든요. 일반적인 기억을 떠올려보면, 트위터가 갑자기 유행했던 때가 2009년, 2010년이었어요. 아카이브 봄도 그때 트위터 계정이 있었어요. 팔로워도 제법 많았고. 근데 어느 순간 트위터가 뭐랄까···. 그때 트위터는 지금처럼 자폐적이지는 않았어요. 굉장히 오픈된 채널에서 블로깅 하는 느낌이었죠. 지금은 누가 트위터 계정 아웃팅하면 화내잖아요. 약간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지니까. 그러면 ‘너 계정이 몇 개니?’ 물어보고. 근데 제가 여기에 대해서 명확하게 대답하기가 조금 어려운 게 제가 그때 공부를 못해서 유학을 갔거든요. 아무튼 아이폰이나 SNS로 촉발된 변화를 크게 느꼈다기보다는 그 당시엔 오히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떤 집회 같은 것들이에요. 집회가 너무 많았어요. 이게 연결이 되는 이야기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온갖 종류의 촛불집회나 그런 것들로 인해서 사람들이 갑자기 모이고 깃발이 생겼다가 갑자기 사라지고. 뭔가 게임을 하듯이 그 안에서 군중들이 수신호를 서로 보낸다던가···. 굉장히 좀 새로운 감각이었던 것 같아요.

윤원화 : 다른 분들은 여기에 대해서 혹시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으세요?
아이폰을 언제 샀는지? 그것이 내 인생을 바꿨나?

강정석 : 저는 2011년도에 아이폰4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어요. 같이 지내던 이수경 작가가 아이폰 3GS를 가지고 있었는데, 손가락으로 사진을 넘기는 거랑 길 찾기가 너무 부러워서 빨리 사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저는 텀블러나 이런 거···. 잘 몰랐어요. 블로그 자체도 별로 한 적이 없고, 그랬었는데, 손가락으로 이미지를 만지는 게 너무 좋아서. 이미지 수집을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페이스북 자체는 2008년부터 했었는데, 처음에는 페이스북을 별로 안 했어요. 근데 이게 스마트폰이 생기니까 뭐랄까···. 아까 율리씨가 했던 말이랑 좀 비슷한데···. 이벤트를 쫓아다니거나 하기에 좋았어요. 소식이 편하게 얻어지니 좋았고 유용했고. 그냥 그런···. 스마트폰이 가져다주는 유용함을 실컷 즐기고만 있었던 것 같아요. 전시 보러 다니는 게 너무 편해진 거죠. 동선을 생각 안 하고 짜기 시작하니까. 그래서 아르바이트 안 하는 날이면 서울을 쏘다니는 걸 되게 좋아했어요. 전혀 모르는 동네에 가서 사진 찍으면서···. 폰으로 사진 찍으면서 놀다가 바로 검색해서 근처 맛집에 가도록 길 찾기를 한다든가. 그리고 아이폰4의 장점은 아무래도 영상이 좋다는 거. HD 영상을 핸드폰으로 찍을 수 있다는 놀라운 점이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그걸로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윤원화 : 실제로 그걸로 작업한 게 몇 년도부터예요?

강정석 : 2011년도에. 그게 어떤 변화냐면요, 2009년도까지만 해도 HD로 작업하는 사람이 진짜로 거의 없었어요, 주변에. HD는 영화하는 사람들이 쓰는 거라고 그때까지는 생각했고요. 2010년도에 학교 장비실에 새로 들어온 소니 캠코더가 HD를 지원했는데, 그걸로 영상을 찍었더니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아, 이건 영화 같다.’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다들 HD 캠코더나 편집 과정을 알려고 하는 거죠. 근데 1년만 지났을 뿐인데 갑자기 그게 핸드폰으로 가능하게 된 거잖아요. 물론 질은 좀 낮았지만, 그 자체가 저한텐 너무 신선한 충격이어서 반드시 그걸로 뭘 해보고 싶다, 돈도 안 들어서 좋다. 뭐 이런 거였죠.

김영수 : 아, 제 차례군요. 네, 저는 사실은 3GS보다 3DS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닌텐도요. 제가 되게 하드한 게이머라 아이폰에서 그 당시 구동되던 게임들이 저한테 매력 있지는 않았거든요. 넘어가는 순간이 있었는데, 게이머들이 안 모일 것 같지만 되게 모여서 게임을 하거든요. 근데 그렇게 모였다 해쳐지는 게 생각보다 되게 빨랐는데 그런 소식을 제가 게시판에서 놓치는 경우들이 생겼던 거예요. 아무래도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 때문에 사실 스마트폰을 샀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아이폰4S를 처음 샀던 것 같고요. 사실 그렇게 변한 것은 잘 모르겠는데,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빨라졌어요. 되게 좋았던 기억이. 제가 카드게임을 하다 보니까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3DS 같은 것도 그때는 통신이 안 돼서 사람들을 만나서 해야 했거든요. 근데 그런 것들을···. 되게 빠르게 만날 수 있어서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돈선필 : 아. 제 차례군요. 저는 사실은 그렇게 전자기기에 관심이 많지 않아서, 별 관심이 없다가 지금 여자친구인 박현정 작가를 2010년에 처음 만났어요. 수업을 같이 들었는데 수업시간에 맨날 뭐 선생님이 말하면 옆에서 계속 이렇게 찾길래, ‘저 사람은 뭐 하는 거지?’ 했는데 그게 아이폰4였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 연애가 시작되고, 옆에서 아이폰을 계속 쓰니까, 보다 보니까 '저거 되게 좋아 보이네.' 하며 쓰고 있습니다. 2011년도에는 제가 유럽을 다녀왔는데 그때 아이폰의 편리함을 체감하면서 저도 2012년부터 아이폰을 쓰기 시작했죠. 그 기억이 전부입니다.

윤원화 : 호상근 작가님은요?

호상근 : 저는 아이폰4S 나오기 전에 4를 사서 썼고요. 정석 씨가 이야기한 것처럼 이미지를 많이 보게 되고, 그렇게 작업도 대부분···. 이미지를 다···. 인터넷에서 찾은 이미지로 그림을 그리고 그랬었거든요. 근데 그런 게 편하긴 편했었는데 뭐 어느 순간 다들 똑같은 이미지 보고 있다는 거에 약간 회의감이 들어서 요즘은 제 작업을 하고 있고 하여튼 ㅎㅎ. 아, 얘기하다가 점점 이게 까마득해지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짧게 대답하겠습니다.

윤원화 : 아까 맨 처음에 율리씨가 말씀하실 때 살짝 나왔던 게, 트위터가 처음에 할 때의 분위기랑 지금의 분위기는 되게 다르다, 지금은 그때만큼 좋지는 않은 것 같다고 하셨는데요.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를 하면 되게 늙은이 같은 느낌이 들지만요···1990년대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인터넷을 하고 뭔가 네트워크 문화를 향유한다고 하는 게 약간 신세계 신문물적인 분위기가 있었단 말이에요. 뭔가 좀 진보적이고 취향이 재미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취미가 맞는 사람들끼리 모일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뭔가 새로운 기획을 해볼 수도 있고, 그런 어떤, 정색하고 말하면 유토피아적인 분위기가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인터넷이 아직 ‘사이버 스페이스’였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지금은 인터넷 문화가 굉장히 폐쇄적으로 변질되었다거나, 진부해졌다거나, 그런 식의 이야기들도 있단 말이에요. 근데 사용자 입장에서 그런 것들을 느끼세요? 아니면 그냥 딱히 뭐···.

강정석 : 아니 그 전에 인터넷에서 유토피아적인 그런 걸 느꼈단 말인가요? 저는 피시통신 시절부터 했는데 한 번도 그런···. ㅎㅎ. 다들 덕질만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활동하신 데가 어디길래···.

윤원화 : 글쎄 저는 인터넷 진입도 늦고 스마트폰 진입도 늦어서, 사용자의 기억이 있다기보다는 담론의 기억이 있는 편이죠. 근데 인터넷이라는 것이 워낙이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에, 시대적으로든 세대적으로든 어떤 큰 변화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게 공허해지지 않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글쎄요. 일단은 넘어갈게요.
2012년으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갈게요. 이 해에는 분위기가 좀 바뀌어요. 일단은 오세훈 시장이 자충수를 두고 낙마해서 박원순 시장이 들어왔고요. 그 전해에 예술인 복지법이 통과되어서 예술인 복지재단이 설립됩니다. 그리고 아트스펙트럼이 돌아왔고요. 문화역 서울284가 공식적으로 개관을 했고요. 인사미술공간이 소리 없이 활동을 재개합니다. 그리고 구슬모아당구장이 열렸고, 길종상가 오프라인 스토어가 열렸고, 반지하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옥인아파트가 철거된 자리에 수성동 계곡이 복원되어서 공원이 됩니다. 두리반도 합의해서 깨끗한 새 두리반을 엽니다. 해밀턴은 문 닫은 지 오래됐고. 꿀은 없어진다 없어진다 하면서도 안 없어지고 2012년을 맞이해요. 어떻게 보면 그렇게 안 없어지고 남아있다는 게 더 이상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2009-10년에는 폐허 같은 공간이 뭔가 갑자기 늘어난 이상한 공간, 에너지가 폭발하는 예외적인 시공간이라는 감각이 있었지만, 2011-12년에는 이게 아직도 수습이 안 되고 폐허로 남아있는 곳이라면 영영 폐허로 남을 것 같은 느낌, 약간 불길하면서도 이미 무감각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줘요. 어쨌든 제 느낌입니다. 근데 이 2012년에 아직도 문을 안 닫고 있었던 꿀풀에서 강정석 씨하고 김영수 씨하고 호상근 씨가 개인전을 해요. 정석 씨는 거기서 <부서지는 망치>를 했고 영수 씨는 거기서 첫 개인전으로 회화 전시를 하셨고, 상근 씨도 첫 개인전으로 <호상근 재현소>를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비디오 릴레이 탄산>도 꿀풀에서 했어요. 이게 전부 2012년 꿀풀 전체 프로그램으로 <수퍼 포지션 - 아트, 사랑, 돈, 거처에 대한 카운터 페스티벌>의 일환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당시 저는 그런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하여간 그 2012년 꿀풀에서 이상한 일들이 되게 많았죠. 제가 예전에도 꿀풀 레지던시에 들어갔던 작가들을 인터뷰 해보면 다들 꿀풀에 대해서 약간 좀 술에 취한 것처럼 말씀을 하세요. 결과적으로 꿀풀을 통과하면서 작가 인생에서 뭔가 돌이킬 수 없는 굴절을 겪는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 이전하고는 달라져요. 돌이켜보면 꿀풀이라는 공간이 2008년 이전의 쌈지하고 비교할 수 있는 어떤 정반대의 대척점 같기도 한데요. 그래서 세 분께 질문을 드리자면, 그때 거기서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었나요? 여기서 이런 건 하면 안 되겠다 이런 건 괜찮겠다는, 결과적으로 꿀풀을 통과하면서 각자가 내렸던 판단들이 있을 건데요.

김영수 : 정석 씨가 정리할 거로 생각하고 이야길 할게요. 사실 저는 그때 개인전을 할 거라곤 생각을 못 했어요. 처음에 얘기했을 때는 레지던시 같은 거라고 이야기를 들었고요. 레지던시 같은 게 있는데 하실래요? 아 네···그러고선 했는데, 미팅하더니, 아 레지던시가 사실은 되게 습하고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에요. 라고 얘길 하더라고요. 아 네···라고 대답을 했고요. 그러고 나서 다음 미팅 때는, 전 레시던시에 간 적이 없는데요 하면서···. 아무튼 레지던시에 있는 분들이 있데요. 그 있는 분들이랑 단체전을 해야 한다고 해서. 아 재밌겠네요 하고 누구누구 있는지 묻고 대충 사람들 이름을 들었었고요. 그러고 나서 잠깐 어디 내려갔다 온 사이에요. 저보고 전시를 개인전을 하라고 해서 갑자기.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개인 형편상 작업을 못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드로잉들을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거기서 내가 뭘 할 수 있나 없나 그런 생각은 별로 고민할 수가 없었고요. 이게 뭐지 하는 순간에 이미 물살에 휘말려서 진행되었고. 레지던시라고 해서 시작은 했는데, 막상 습하대서 안 갔었고, 단체전을 해야 한다고 해서 재밌겠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사실 개인전이 되어버린 순간이어서. 그게 또 개인의 이름이 걸리는 순간 책임은 져야 하잖아요. 할 수 있던 건, 예전의 작업을 다 꺼내는 것뿐이었고. 근데 그러기엔, 제 감각들은 작업을 만들 당시랑 너무 달라져 있는 상황이었고. 되게 안 맞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의 어떤 것들과. 제 마음도 그렇고, 상황도 그렇고. 옛날 작업을 꺼내놓는 것도 그렇고. 이상한 경험이었어요. 제 첫 개인전인데. 그리고 그 이전에도 전시를 많이 하진 않았어요. 근데 갑자기 이상하게 되게 옛날 작업을 꺼내는 게 좀 이상했던 것 같고.

윤원화 : 그럼 회화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하신 건 언제 정도에요?

김영수 : 그만두었다기보단, 아버지가 졸업할 때쯤에 투병 생활하셔서. 그만두었다기보다는 잠정적인 중단을 했던 것 같고. 그러면서 꿀풀에서 그렇게 전시를 하면서, 아, 이거 그만두어도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상황이···. 사실은 그런 공간이 좀 더 있었던 것 같아요. 문래 쪽에도 있었고. 근데 그런 게 이제 주목도는 별로 없고, 공간 그냥 있고. 이런 거 안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에 거기 되게 습한데에 제 작업이 놓이니까 되게 인간극장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아 이렇게 한번 해서 뭐하지?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고, 그만두어도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뭐 다른 걸 하면 뭐하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고. 소비되는 거랑 유통되는 건 다른 거니까. 여기선 소비는 되어도 유통은 안 되겠다 싶어서. 쿨하게 관둬도 되겠다는 이런 생각 했던 것 같아요.

호상근 : 영수가 말한 그 공간에서 저는 레지던시 같이 작업을 했고요. 그 안에서 작업을 했었어요. 학교에서 제 자리도 없어지기도 하고 학교가 재미도 그다지 없었고 해서 어떻게든 나가고 싶었는데. 마침 이야기가 잘 진행이 돼서. 하겠냐고 해서 저는 알았다. 좋다. 하고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거기서···. 지금은 거기가 아마도 예술 공간이잖아요. 거기 귀신 나올 거 같은 분위기고 힘들긴 힘들었어요. 여름에 습해서 대책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면서. 당장 공간도 없고. 작업실 쓰던 곳도 침수가 돼서, 옛날에 했던 작업 다 물에 잠겨서 버리게 되고. 그러고 있었는데 그리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호상근 재현소를 거기서 주야장천 앉아서 했었어요. 거기는 아무거나 막 할 수 있었어요. 워낙 엉망진창인 데라서. 내가 못 박아도 돼요? 드릴 박아도 돼요? 안 물어봐도 돼요. 페인트도 말도 안 되는 파란 색 발라져 있었는데, 그거 보고 처음엔 깜짝 놀랐거든요. 이런 데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거기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곳이었어요. 저는 정말 부담 없이 몸은 정말 힘들었지만 재밌게 했었어요. 거기서 영수란 친구도 만나고, 정석 씨도 만나고.

윤원화 : 처음 만나신 거예요?

호상근 : 네, 그때 영수를 처음 만나고. 정석 씨도 탄산을 하고 저도 그걸 보게 되고. 거기 옆에 카페도 있고. 한남동이고. 밑에는 꽃땅이란 곳에서 공연을 자주 하고. 제가 있던 자리에서 노래를 다 들을 수가 있었거든요. 자연스럽게 밴드나 그룹사운드 하시는 분들···. 누군가 기록을 하는 상황에서 이런 말은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어서···떨리면서 말하고 있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한남동 다들 멋 내고 오는 분위기가 재밌었어요. 앞에 꼼 데 가르송이 있고. 거기서 옷 사서 쇼핑백 들고 오시는 분들이 있고. 가방 내가 봐도 비싸 보이는데, 어울리지 않는데 거기에 있는 것도 재밌었고.

강정석 : 꿀풀 얘기 들으니까, 거기서부터 이미 꼬였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일단 저는 꿀풀에 어떻게 가게 되었나 하면. 정윤석 작가가 제 입학 동기인데. 풀에서 오라고 했다고 전해줬어요. 정석이 너를 불렀으니 가보라고 했어요. 갔죠. 갔는데 그쪽에서는 정윤석 작가가 오는 거로 알고 있었어요. 일단 네가 정윤석이랑 통화해라. 통화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정석이 너랑 다 얘기가 돼서 간 거다. 그렇게 알라고 해서. 일단 끊었죠. 눈앞에서. 갑작스럽게 그 순간 김희진 디렉터님 앞에서, 그 옆에 있는 홍태림 씨로 보내져서, 태림 씨에게 작업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근데 전부 영상 작업인데 거긴 컴퓨터는 있어도 스피커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소리 없이 작업을 보게 되었어요. 이후에, 저는 영수 씨가 말씀하신 단체전 이야기는 기억이 안 나고요. 꿀풀 공간을 맘대로 써도 된다는 것에 가까웠어요. 레지던시지만 공간이 좀 그렇다고. 상황이 좀 주먹구구에요. 거기서 <부서지는 망치>를 하기로 했어요. 하기 전에 엄밀히 레지던시는 아니지만 레지던시처럼 방이 몇 개 있으니까 방을 고르라고 하시더라고요. 고르면 레지던시를 하게 되시는 거예요. 하시더라고요. 겨울이었어요. 2월이고 추웠는데, 난방기구가 있냐는 데, 없다는 거예요. 여하튼 해보겠다 하고 1주일 프로젝트를 계획했죠. 프로젝트 직전에도 전화가 와서 정윤석과 네가 협업을 하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왜 네가 혼자 프로젝트를 하느냔 전화를 받았어요. 제가 뭘 진행해도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누가 하는 거야?' 같은 문제라고 느꼈어요. 전시 중에 거기가 영하 11도였어요. 너무 춥고. 1층 안에 있는 화장실은 창고가 돼서 못 쓰고, 2층 올라가서 가슴 라운지라는 카페를 가서 화장실을 썼어요. 근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노숙자 같은 분이 들어와서 1층 창고에서 소변을 누고. 프로젝트 자체는 좋았어요. 태림 씨가 나중에 프로젝트 이후에도 관심을 주셨고. 근데 다 끝났을 때 아까 말씀하신 그 전시명. <수퍼 포지션_아트, 사랑, 돈, 거처에 대한 카운터 페스티벌>이란 이름으로 이 프로젝트가 되어 있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그런 말을 들었어요. 행정상의 이름이라는 식. 아 알겠습니다···. 그걸로 50만 원인가를 지급 받았던 것 같아요. 이후에 레지던시 아니지만 레지던시니, 뭘 더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 김에 여름쯤에 탄산을 하게 된 거죠. 그때 동료가 작업을 못 하고 있다던가, 만든 작업이 있는데 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걸 보고서 탄산을 하기로 한 거죠. 저 자신도 그랬고. 꿀풀은 신생공간이랑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건데, 신생공간은 정말로 네가 뭘 해도 상관이 없다는 느낌이라면, 여기는 정말로 네가 뭘하든 관심이 없다는 상태였어요. 탄산 열어두고 와서 3회차엔가? 풀 쪽에서 한 분이 오셔서. 저는 그래도 보러는 오는구나 하고 기뻐했어요. 근데 탄산 토크에서 행사가 제 사비로 열렸다는 점을 밝히니, 2월 프로젝트로 받은 50만 원을 상기시키면서 당신은 돈을 받았다. 그런 말을 했어요. 일종의 입단속. ‘정석씨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대충 그런 식이었어요. 당시 상근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거기서 레지던시로 삼아 작업하는 걸 보고, 아 솔직히 이 사람이랑 친해지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던 게 기억이 나고.

(일동 웃음)

강정석 : 어떻게 이런 데서 레지던시를 하나. 자존심이 없나?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강인한 사람이다. 이렇게 보기도 하고 ㅎㅎ

윤원화 : 알겠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꿀풀에 대해서 정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늘 굉장히 이상한 이야기를 듣거든요. 어쨌든 꿀풀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는 동안에, 돈선필 씨는 반지하를 여세요. 일단 공간을 만들어 두고, 열어 놓게 됩니다. 저는 반지하에 대해서는 2013년에, 그때 당시에 일종의 신생 공간 이야기를 수집하면서 처음 들었는데요. 여기 계신 분들은 반지하가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 아시겠지만, 반지하는 정말로 작업을 놓고 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해서 만들게 됐다고, 사진 찍을 데도 필요하고 그랬다고 그때 말씀을 해주셨죠. 작가가 작업을 하는 작업실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작품의 관객이 되어 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라고 일단 저는 그렇게 이해를 했었어요. 그런데 이런 전시 비슷한 것이 계속 축적되면서, 작가들이 서로의 관객이 되어주기도 하고, 아는 사람이랑 보러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어떤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것 같아요. 반지하 텀블러도 처음에는 아주 단출했는데, 지금은 거기에 텍스트도 들어가고 비디오 기록도 들어가고 그러면서 좀 더 공간이 확장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요. 반지하 관리자로서 돈선필 씨는 공간의 전개, 진행 상황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지?

돈선필 : 일단은 제가 이렇게 공식 석상에 ‘관리자’라는 이름으로 나가는 걸 계속 꺼리고 있어요. 작년에 있던 토크에 갔다가, 다시는 이런 자리에 나가지 말아야겠다···반지하 관리자란 이름으론. 그런 생각을 했는데 흐름으로는 제가 이렇게 말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고. 관리자 입장에서 반지하를 쭉 봤을 때는 2012년 6월에 처음 생기고 여기까지···. 지금은 2015년 10월이죠. 한 3년 넘는 시간 동안 봤을 때는 변화 추이가 있긴 한데 전반적으로. 프로젝트마다 관객이 많이 올 때가 있고, 한 명도 안 올 때도 있고 해서 평균치를 낸다면 큰 변화가 없는 거 같기도 해요. 관리자 입장에선. 외부에서 보면 콘텐츠, 예를 들면 비디오라던가 추가되는 거···웹상에서 보면 뭐든지 좀 거대해 보이는 경향이 있잖아요. 근데 저는 계속 오프라인 현장에 있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 변화 추이를 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게 많진 않았어요. 물건들이 좀 많아지고, 오는 사람들이 변화하는 정도. 질문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까, 변화의 기점이나 그런 게 있었다면, 2012년 12월에 강정석 작가가 반지하 계정으로 메일을 보냈어요. 자기가 이런 작가인데, 방문하고 싶다. 그때는 사무실 공간도 없었고, 반지하 방 한 칸에서 둘이 만났었는데. 그때가 원흉이 돼서 지금 제가 이러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윤원화 : 강정석 작가 말씀하실 게 있으세요?

강정석 : 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당시엔 반지하 건물 옥탑방에서 대화했죠.

윤원화 : 토크 전에 돈선필 작가님이 오셔서, 반지하라는 게 필요 이상으로 거대하게 생각되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하면서, 반지하 관련한 질문을 빼도 좋지 않겠느냐 그런 말씀도 하셨어요. 옆에서 보는 입장에선 반지하라는 게 작지만, 일종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고, 어쨌든 주변 작가들이 반지하라는 곳을 귀하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거든요. 한편으론 만만히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소중한 거죠. 그래서 혹시 다른 분들이 대신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반지하라는 공간에 대해서.

강정석 : 선필 씨를 만났을 땐, 저는 이미 미술 활동에 지쳐있었어요. 어떻게든 드라이브를 걸어서, 반지하가 재밌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탄산을 하면서 누가 안 끼고 스스로 모든 걸 조직하면 돈도 적게 들고, 재미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을 할 공간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반지하에 일단 만나러 가봤더니 일단 운영자가 나이도 같고, 방 안에 f(x) 포스터가 있었고. 그게 마음이 들었어요. 아 이 사람이 센스가 있구나. 그런 생각. 그래서 뭔가를 해보자는 식으로. 근데 한편으론 운영까지 끼고 싶지는 않아서 발을 살살 빼면서, 뭐 좀 해보자는 식으로 이야기는 여전히 하면서, 박이소 작가가 미국에서 운영한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 이야기라던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롱 갤러리(The Wrong Gallery) 인터뷰집 본 것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고. 뭔가 만들면 안 돼요? 하면서 졸랐던 기억이 납니다. 운영을 돕는 건 아니니,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더 아끼게 되는 것 같고.

윤원화 :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반지하가 2012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합니다. 그 외에도 2012년에는 여러 가지 일이 많았죠. 이를테면 <상상력에 밥을>도 2012년에 있었고, 그래서 이듬해에 미생모가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여기 계신 분 중에 미생모나 <상상력에 밥을>에 참여하신 분 계세요?

강정석 : 미생모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윤원화 : 그때 활동은 어떤 생각으로 처음 하시게 되었나요?

강정석 : 선배, 동료 작가들이 불러 주었고, 처음엔 미생모 회의에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역할로 있었어요. 그 <상상력에 밥을> 이라는 상황을 설명하려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두리반과 이후 자립 음악 생산조합에 대한 이야기 이후라고 느꼈고. 열정 노동, 불안정 노동, 주거 문제 등 그전에도 미술인들이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고는 있었어요. 아까 영수 씨는 꿀풀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에 대체로 그랬다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주변의 동료 작가들, 졸업해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님들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대부분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상상력에 밥을>이 있었고. 2012년 총파업에 꽤 많은 주변인이 갔어요.

윤원화 : 다른 분들은 그걸 어떻게 보았다거나, 관련해서 더 하실 얘기가 있으세요?

(침묵)

윤원화 :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은 그다음으로 넘어가죠. 그래서 2012년이 지나가고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진짜 이상하게 흘러가요. 2013년에는 미생모도 시작됐지만 박근혜 정부가 시작됐고, 그러면서 ‘융복합’이나 ‘미래 창조’ 같은 키워드가 위에서 아래로 하달이 되면서, 기금을 받으려면 융복합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상한데 재미도 없는 전시들이 많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는 단체전이 가장 재미없었던 시기가 2013년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2013년 연말에 커먼센터랑 시청각이 열리고, ‘청년’이라든지 젊은 세대 이야기들이 간간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해엔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관했죠. 큰 게 열리니까 뭔가 있을 줄 알았지만 아무것도 없었고, 진짜 아무것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전 솔직히 2013년은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혹시 2013년에 인상 깊은 무언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으세요?

(침묵)

윤원화 : 없어요? 네. 그런 상황에서 2014년이 밝아요. 비엔날레의 짝수 해였고, 기성 미술가들이 할 수 있는 한 모두 개인전을 했었고. 굉장히 화려한 해였지만 그래서 다음이 기대된다기 보다는, 제도권이 남은 패를 다 불태워서 소진해 버리는 것 같았어요. 내년에는 어쩌려고 이렇게 다 써버리지? 그런 느낌이었죠. 그런 와중에 새로운 세대를 기성 세대와 비교 대조하는 전시들이 나옵니다. 그때 당시로써는 크게 한방이 있었던 전시는 없었는데, 그래도 전시들이 계속 열려요. 2014년 2월에 사무소에서 기획한 하이트 컬렉션의 <미래가 끝났을 때>가 열리고, 3월에 커먼센터에서 <오늘의 살롱>을 하고요. 5월에 <아트 스펙트럼>이 열렸고, 6월에 ‘세마 블루’라고 해서 서울시립미술관의 청년작가전 <오작동 라이브러리>가 열립니다. 7월에 플라토에서 <스펙트럼-스펙트럼>이라고 해서 스펙트럼 작가들이 신진 미술가들을 데려오는 전시를 했고요. 가을에는 ‘터전을 불태우는’ 비엔날레를 했고, 11월에 커먼센터에서 유능사가 기획한 <청춘과 잉여>를 했고요. 12월에 <젊은모색>이 열렸고. 그리고 12월에 교역소에서 <상태참조>를 했고, 그다음부터는 아시는 바대로, 신생공간의 2015년이 시작됩니다.
이때를 돌아볼 때 맨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2014년하고 2015년의 온도 차가 컸다는 거예요. 2015년은 지금 우리가 되게 길고 복잡하고 뜨거운 해라고 느끼고 있지만, 2014년은 그렇게 뜨겁지 않았어요. 오히려 새로운 세대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많이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딱 눈에 들어오는 게 없을까, 그런 미묘한 느낌이 이쪽도 그렇고 저쪽도 그렇고 2014년의 의문이었죠. 그러면서 ‘동시대 미술’이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오히려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고요. 그러는 와중에 작은 공간들이 끊임없이 문을 열어요. 세운상가 일대에 800/40, 300/20, 개방회로 같은 데가 2014년에 문을 열었고, 겨울에 교역소가 열렸고, 조금 있다가 창신동에서 지금여기가 열렸고, 계속 늘어나게 되죠. 2015년의 상황은 어느 정도 공유가 됐고, 그걸 바탕으로 굿-즈가 만들어진 이야기도 오프닝 토크에서 했으니까요. 일단은 2014년에 교역소가 만들어지던 상황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김영수 : 네. 사실은 2014년 가을 겨울, 교역소를 쭉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밖에 많이 못 나갔어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습니다. 엄청 추웠던 기억이 있고요. 일단, 교역소 만들면서 처음으로 <상태참조>란 이벤트를 했었는데, 당시 생각했던 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때 정의하지 못했고, 최근 와서 들었던 생각이에요. 그때 작가들 만나면서 설득 다닐 때 했던 말이. 그래 너희 그래서···. 그때 저희 사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설득하기 되게 힘들었거든요. 너희 이거 뭐 하는 거니. 너네 이렇게 해서 뭐 할 거야? 했을 때, 우리가 젊은 작가 다 모아서 뭘 하려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이런 거로 젊은 작가들의 지금의 지형도를 보여주고 싶은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꼭 했거든요. 그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믿었던 건···젊은 작가의 포지션을 찍어가며 지형도를 그리는 거는 그때 되게 낡았다는···. 낡은 감각으로 느낀 것 같고. <상태참조>라는 게 작가들에게 어떤 타임테이블을 만들어 주는 거잖아요. 지형도가 아니라 타임테이블로 나열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었던 것 같고. 전 게임 오타쿠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아직도 인벤 들어가서 게시판을 봐요. 타임라인을 안 보고. 저 같은 사람이 뭔가를 의식하면 모두가 의식하고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하는데, 게시판에 의존되어 있던 사람들도 타임라인을 의식하게 된 때가 그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좀 하게 됩니다. 요즘.

윤원화 : 어쨌든 공간을 새로 만들어서 여러 사람을 모아서 이벤트를 하는 것은 시간이나 에너지가 많이 투입되는 일인데, 그걸 왜 처음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어떤 동기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기회가 주어졌다든지.

김영수 :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이 맞을 거 같아요. 첫 번째는 기회였고요, 두 번째는 오기였고요.

윤원화 : 오기라고 하시면?

김영수 : 특수한 상황인 거 같긴 한데. 교역소는 준비를 굉장히 오래 했어요. 2012년에 ‘작업을 그만둬도 되겠다.’ 작업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존에 하던 게 작업은 아니었겠죠. 어찌 되었든, 기존에 하던 행위를 그만둬도 되겠다고 생각을 한 이후. 2012년 중순부터 교역소 구상을 했어요. 근데 그게 계속 무산이 됐던 것이거든요. 2014년까지. 그 오기가 좀 남아서 했었던 것 같아요. 그걸 할 수 있었던 어떤 기회가 주어졌던 거는 확실한 거 같아요. 제가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이긴 했거든요. 임대라던가,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하는 것들이, 운이 좋게 어느 순간에 딱 맞아 들어가면서, 했던 거 같아요. 갑자기 제가 무슨 큰 뜻을 가지고 했다기보다, 그냥 어떤 오기가 있었고, 주변에 같이 재밌게 놀 수 있는 친구들이 그때 있었고. 그전에는 계속 맞지 않는 사람들과 일을 하려고 했었던 게 있었는데. 그전에는 그런 일들을 꼭 기획자랑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랑 일하면서 계속 안 맞았고. 결국 주변에 놀던 원래 친구들이랑 하게 되면서, 갑자기 아다리가 맞아 들어가면서, 정말 그냥 기회였던 것 같고. 좀 재밌는 거 해보자. 그 친구들이 그때 우연으로 실업자가 되면서. 했던 일이라.

윤원화 : 알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다섯 분 모두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먼저 신생공간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죠. 소위 '신생공간'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이를테면 신생이 아니다, 옛날부터 해 왔다든지, 아니면 몇 년이나 계속한 후에도 이걸 ‘신생’이라고 부를 거냐 든지.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2014년~2015년 사이에 공개적으로 전시를 하는 작은 공간들이 확 늘어난 것은 사실이에요. 이를테면 아카이브 봄이나 케이크 갤러리처럼 기존에 존재하던 공간도 있지만, 그 공간들이 지금처럼 연례 기획전시를 하게 된 것은 2014년부터라고 알고 있고요. 그전까지 2010년 2011년에는 오히려 전시라는 형식에 대한 회의가 좀 퍼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새로운 것을 한다고 하면 미술이든 미술 외적이든 뭔가 전시를 벗어난 활동 방식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반면에 2013년 이후로는 확실히 전시가 많아요. 뭘 해도 전시 형태가 돼요. 관객이 오고요. 그렇지만 이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라는 것은 이를테면 2008년 이전의 ‘전시’와는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관점에 따라선 전시가 아닌 무언가 다른 포맷의 테스트 같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반지하의 전시-프로젝트들도 그렇고. 교역소의 전시-이벤트들도 그렇고. <던전>도 그랬고, 지금 굿-즈도 일종의 전시이고 관객 입장에서 굉장히 재밌는 이벤트지만, 어쨌든 ‘전시’ 하고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요.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어디로 귀결될 것인가, 무엇을 지향하는가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지금 2015년 겨울로 진입한 시점에서, 공간을 운영하거나 작업을 해 나가는 입장에서 ‘전시’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어떤 것을 전시라고 명명함으로써 뭘 할 수 있다거나, 뭘 볼 수 있다거나, 전시에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윤율리 : 이런 곤란한 질문은 항상 저한테 먼저 하셔서···. 굿-즈는 사실 전시는 아니죠.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 전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생각해요. 굿-즈를 다들 보셨겠지만, 1층과 2층으로 나뉜 공간에서, 어디는 굉장히 아트숍 같고, 반대로 어떤 부분은 굉장히 현대미술의 현장 같은 느낌이고요. 물론 제가 하려는 얘기가 ‘굿-즈가 전시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는 아니에요. 근데 다만 굿-즈를 준비하면서 처음에 의도했든 아니든, 기획자와 작가들 사이에서, 전시를 조금 더 회의하게 된 지점은 있어요. 전시라는 게 대체 뭔가? 우리가 전시를 왜 하는가? 이런 질문을 당연히 다시 던질 수밖에 없는 지점들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그걸 루틴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아니면 퍼포먼스 하시는 분들의 언어로 쪼라고 할 수도 있겠고. 어떤 형식이 돼버린 뭔가를 반복하는 거죠. 화석 같은 것들을. 근데 굿-즈를 하게 되었을 때 가장 고민했던 게, ‘저 작업을 어떻게 팔 건가?’ 보다도, ‘(저 작업을) 어떤 지점에서 관객과 맞닿게 할 건가?’ 였어요. 이건 전시에 대한 고민이거든요. 전시라는 게 내 작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그런데 평소 전시하던 것들을 그대로 갖고 와서 이 기획안에 두자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은? 이상한 틈을 다들 느낀 거예요. 근본적으로 전시를 통해서 관객들이 작품을 잘 만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이고. 제 생각이긴 한데, 결국 우리 사이에서 어떤 형식이 되어 굴러가는 전시의 모델들은 화이트 큐브 안에서 이미 부나 힘을 가진 주체가 다시 부를 가진 컬렉터와 효과적으로 가치를 교환하기 위해 만든 동선은 아니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반면 지금 강정석 작가 같은 경우에는 영상 작업을 어떻게든 팔아보려고 약을 팔고 계시는데, 이런 것들이 의미 있는 전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대체 어떻게, 어떤 장치를 만들어야 하는가, 싶은 거고요. 결론적으로 마지막 결착점에서 신생공간이 이와 연결된다고 느낀 부분은, 신생공간은 어쨌든 전시를 위해서 지어진 건물이 아니잖아요. 그렇다 보니 가용 가능한 것들의 범위 안에서 전시가 성사되거든요. 작업이 놓였을 때의 모습을 (미술관과는) 다른 각도에서 상상해야 해요. 결과적으로 신생공간이 중심이 돼서 굿-즈를 만들고, 새로운 전시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강정석 :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길 것 같은데. 제 경우엔 전시라고 하면, 다들 ‘기획’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몇 번 안 되는 전시를 하면서, 어떤 기획을 짜고, 그게 작가들에게 던져지면 뭔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고. 그걸 던져준 상태에서 스스로들 안에서 열심히 고생하다가, 설치하는 날이나 몇 주 전에 미팅 한 두 번 할 때 다른 작가들을 만나요. 그럼 어색하게 소개를 해주시고, 그런 다음에 전시 열리죠. 항상 무척 허무했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느낌? 사회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전시에는 미술인만 온다던가. 그래서 진짜 교류를 한다는 게 뭘까? 미술가로 경력을 쌓으면 뭐가 좋을까? 고민했어요. 2012년 <상상력에 밥을> 즈음에도 이미 분위기가. 전시나 행사가 비슷비슷한 예산 안에서 돌아가고. 비슷한 방식으로 돌아가는 업계의 관습에 다들 익숙해져 있다는 게 공유된다고 느꼈어요. 어떤 전시를 꾸리고 얼마 정도를 작가에게 던져주면 신작을 요구할 수 있고. 이런 프로토콜이 근거 없이 단순했고. 신진 작가가 그 틀 안에서 소비되는 모습도 비슷했기 때문에. 동료 작가를 만나면 결국 그 안에 우리도 똑같은 상황이지 하면서 패배감에 젖어 있기도 했고. 당시 에르메스 상쯤 되는 게 이렇게 젊은 작가까지 소비하기 시작을 하면, 그 이후 작가가 이 미술계에서 더 소비될 곳도 별로 없지 않으냐. 이런 얘기를 하기도 했어요. 반지하에 가서 선필 씨를 조르고 할 때부터···. 그 직전에는 ‘공간 1’을 하던 김동희 작가도 만났었죠. 둘 다 뜨악했겠지만, 첫 만남부터 속에 있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어요.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 있던 거죠. 찾고 있었어요. 교류라든지···. 전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뒤에 장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과 사람이 정말 만나는 장치. 탄산 운영하면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익숙해지고, 작가들끼리 교류하는 걸 유익하다 느끼게 되고, 반지하가 오픈베타로 운영이 되기 시작한 그때 부터는, 이게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전시’를 잘 안 봤어요. 지겹다고 생각을 했고. 반지하에서 일어난 활동이 훨씬 소중하고 즐겁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작가를 만날 수 있고, 만나면 진짜로 이야기를 나누고, 반지하라는 곳은 참여한 작가가 관객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곳이니까. 지속해서 만나면서 이런 저런 사람을 서로 알게 된 거예요. 영수 씨가 교역소가 <상태참조>를 하려고 한다고 전했을 때, 영수 씨도 알고 저도 아는. 혹은 영수 씨가 몰라도 소개해 줄 수 있는 작가라든지. 제가 기획자도 아닌데 같은 학교 사람도 아닌 그런 사람이 열 명 스무 명이 있는 거예요. 그런 왕성함에 취해 있었고. 그런 게 2014년까지 계속 따라다니던 어떤 방향이었고.

김영수 : 여기서 ‘전시’라고 하면, 아까 정석 씨말대로 어떤 '기획'인 거 같아요. 정말 전시가 보이는 것에 대한 것은 아닌 거 같고, 기획이라는 거 같은데. 이건 교역소 운영하면서 많이 들었던 생각이에요. 기획이 없다. 사실이에요. 사실이고. 기획하고 싶었던 게 있는 건 아니에요. 단지 보고 싶었던 장면이 있어요.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 뭘 해야 할지를 생각했던 거지, 뭔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보고 싶었던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서 그 전시를 만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작가여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보드게임 하면서 작가라고 하니까 되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어떤 이상한 무리를 상봉동에 데려가면 재밌겠다는 단순한···생각들. 생각도 아니에요. 보고 싶은 장면이에요 그냥. 강정석이랑 이런 사람들 우르르 와서 뒤풀이나 가고. 저기 가서 칼국수나 먹으면 맛있지 않을까? 이 정도 생각을 가지고. 그러려면 뭘 해야지? 이런. 거기부터 생각해서. 뭐하지? 생각해서 그때 생각한 게, 일단 교역소는 벽도 없고, 뭣도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거는 조금조금. 가진 조건 안에서 채워서 그림을 만들 수 있게. 그게 전부였던 것 같고. 지금도 그렇고. 굿-즈 하면서도 계속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냥 굿-즈 같은 거 작가들이 좀.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봤으면 좋겠는데. 고민하게 하려면 뭘 해야 하지? 그럼 어떤 그림을 만들어 내야 하지 내가? 지금 보셨겠지만 거의 작가들이 상인 역할극 하는 느낌이거든요? 그런 모습들 생각한 거예요. 그런 거 하면서 자기가 뭘 팔 수 있을지 고민하고. 어떻게 팔아야 할지 고민하고. 지금 작가들 제가 생각할 때에 소비는 되게 많이 된다고 생각해요. 유통은 다른 거예요.

강정석 : 같은 맥락인데, 보는 게 다 똑같잖아요. 지난 몇 년 무슨 기획안 받으면, 서로 보는 게 다 똑같으니, 이 사람도 이거 보고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드는 거죠. 서로 보는 것도 비슷하고. 다들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고. e-flux나 여타의 웹진 보고. 포트폴리오도 웹사이트로 보고. 제 작업도 다 유튜브 같은 데에 올려뒀고. 우리가 보는 거에 기획이 이미 들어가 있어서. 기획을 받았을 때, 아 이런 방향으로 해봐야겠다. 이런 게 아니고. 그런 기획이 나올 걸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죠. 그래서 교역소가 좋았거든요? 연결통로만 만들자는 느낌. 서로 연결돼서 만들어지는 타임라인식의 통로.

김영수 : 정석 씨말과 비슷한 거 같아요. 맨날 서로 똑같은 거 보니까. 보고 싶었던 거 만들고 싶었던 거 같고. 아무튼, 잘 정리해 준 것 같아요.

돈선필 : 뒤로 갈수록 할 말이 없는 질문이 되고 있는데요. 처음 질문받았을 때, "전시란 걸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가요?", 모든 작가가 전시하고 싶어하는 건 사실이고, 전시란 거에 대해 부정하려 하거나 그런 건 개인적으론 별로 없습니다. 전시도 좋아하고.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전시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전시하는 형식 방식이 뭔가 반복되고 있는. 그게 좀 지루해진 것 같고. 근데 어떤 단어를 쓸 때, 그 단어의 정의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전시라고 할 때, 머릿속에 그리는 뷰가 같아지는 게 이 시점의 문제였던 거 같고. 그게 우리에게 되게 지루했던 것 같고. 그래서 전시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부분이 필요한데, 물리적 공간, 예산, 기금···. 뭐 이런 게 필요하겠죠. 그런 거 말고 정말 우리가 하고 싶었던 전시? 영어 단어 전시에 어두에 뭔가를 배출한다는 뜻이 있듯이, 작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최소한의 조건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생공간이란 데가 보여주는 싶은 걸 보여주는 장소로 활동을 하고 있는 거 같고. 그런 의미에서 생각을 해보니 반지하에서 프로젝트라고 하는 것은, 전시라고 안 하고.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가능성을 좀, 작가들에게 주고 싶었고. 자기 혼자만 해도 되고, 관객 0명이어도 좋다는. 하고 싶은 걸 한다. 였고. 지금은 그렇습니다. 전시···.

호상근 : 부담되는데. 전시. (잘 들리지 않음) 아 너무 부끄러운데, 저 분명히 이거 말하면서 나중에 이불킥 할 것 같아요. 요즘 매일매일이 이불킥인데, 전시한다는 걸 책 하나 만드는 거, 혹은 어떤 앨범을 만드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래서 작가를 약간 팬심으로 바라보는 것도 있고. 그런 면에서 굿-즈 같은 이런 걸 보면 이건 무슨 컴필레이션 앨범 같은. 음악처럼 내가 비유···. 비유를 하는데. 아 이걸 어떻게. 이걸 보고도 다음에 이 사람을 또 챙겨 보고 싶고 그런 게 좀 있거든요? 지금 많은 사람에게 팬심을 가지게 된 상황인데. 다음을 또 기대하면서. 저는 전시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윤원화 : 알겠습니다.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시간이 거의 다 되기도 했고, 얘기들이 겹쳐져서 여러 가지 모아서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요. 굿-즈가 결국에 이렇게 힘든 일이고, 사실 돈벌이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거의 일 년 가까이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하면, 지원금을 받기는 했지만, 아르바이트할 시간이나 작업할 시간을 빼서 이 일을 하는 거잖아요. 어떤 종류의 원동력이 이것을 끝까지 끌고 오게 했는지, 그게 두번째 질문이었어요. 그리고 지금 굿-즈를 보는 여러 관점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연례행사가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한번 하고 끝이라고 하는데요. 저는 어쨌든 굿-즈를 일종의 테스트로 인식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게 성황리에 마무리가 될 것 같지만, 그 결과를 떠나서 이게 테스트라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 테스트 결과를 해석하고, 전에 몰랐던 것을 알아내고,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시스템을 개선하고 다음 테스트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배우는 게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끌고 왔는데, 일단 오픈해 놓고 닫을 때가 다 되어서 보니까 이런 부분은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거나, 이런 보강이 필요하다거나, 이건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거나, 이런 점이 재밌었다거나, 이런 점의 의외로 중요했다거나, 어쨌든 이건 사실 끝나고 일주일쯤 죽었다가 깨어난 다음에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 할 문제겠지만···. 현재 시점에서, 내가 이걸 왜 했던 것 같은지, 해놓고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하는 것들을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윤율리 : 대체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하나. 조금도 생각할 여유가 없네요. 사실 신생공간이라는 프레이밍이 불편하다고 제가 얘기했던 건···. 물론 지금은 크게 불편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왜냐면 신생공간이라고 하니까 다들 더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큰 고민 없이. 아 그럼 신생공간 하는 게 좋겠다 하고 생각하게 됐는데. 아무튼, 신생공간이라는 프레임이 붙었을 때,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뉘앙스를 느꼈어요. ‘도대체 너희는 뭐냐?’ 더 나아가면 ‘너희가 지금 뭔가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데, 그게 결국 너희들 안에서 맴돌 뿐이지, 정말 너희가 뭔가를 할 수 있겠냐?’, 이런 종류의 질문 혹은 물음표가 우리 주위를 부유하는 듯한. 그런 느낌은 지난 일 년간 굉장히 잦았고요. 어떻게 보면 그에 대한 반작용처럼 우리가 어떤 것들을 할 수 있는지 혹은 할 수 있을지, 또 고민했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시스템을 가지고 체계화된 것들을 보여줘야 한다, 이런 식의 압박도 있었고요. 유치한 표현이지만 약간은 증명할 필요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런데 이제 거기 참여했던 기획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이걸 같이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생긴 점도 있어요. 분명히 쉽지 않은 형태와 규모의,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 이런 준비를 일 년 동안 해오면서 그래도 이 행사가 사고 없이 많은 관객분의 호응 속에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게, 결국 이 행사를 같이 만든 사람들이 시쳇말로 많이 굴러 본 사람들이고, 이것저것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들이 하는 공간이 내년에 없어지든 뭐 내후년에 없어지든 사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수평의 띠라고 할까요, 지층이라고 할까요. 이런 걸 형성하고 있는 내 주변부가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는 안정감, 안도감, 그런 것을 느꼈어요. 사실 그 과정에서, 저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제 식으로 보자면 작가들의 나이브함 같은, ‘다 좋지 뭐’ 하는, 반대로 저는 또 싫은 건 너무 끔찍하게 싫은 사람이라 저분들도 제가 이상했을 거예요. 쟤 뭔데 저러나. 그런 매우 많은 각도의 다른 생각들이 굿-즈에 있었던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서로 적당한 간격 속에서 행사가 진행됐던 게 좋았던 점이고요. 의외로 어떤 분들이 찾아오실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잘 상상하지 못했어요. 저희도 확신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이 행사에 오시는 분들을 보면서 우리가 미술 작업을 할 때나 창작 활동을 해나갈 때, 누가 우리의 지지자가 되어 줄 수 있고 함께해 줄 수 있을지, 이런 그림을 명확하게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강정석 : 율리 씨가 한 말과 많이 겹칠 수도 있지만, 질문 자체에 충실히 대답해 볼게요. 일단 굿-즈를 여기까지 몰고 온 가장 큰 원동력이 율리 씨와 같은, 동료들이었던 것 같아요. 일단 만났는데 할 줄 아는 게 각자 많았고, 서로 겹치지도 않았어요. 누가 뭘 좀 모른다고 짜증 내는 사람 한 명이 없고, 서로 강제하지 않는데, 일이 잘 굴러가는 거예요. 엄청 성실해요. 욕망이 단순한 사람들이고, 재밌고 작동하는 걸 만들고 싶다는 점에 동의하면서도, 의견이 부딪힐 땐 양보를 안 하는 점도 재미있고. 즐거웠어요. 반쯤은 불안감도 있었죠. 행사 중간에 여러 맥락이 걸쳐 있었으니까. 신생공간 관련한 이슈나, 뭔가 증명해야 할 것 같거나, 우리가 뭔지 밝혀내야 할 거 같은 느낌이나 압박 있었지만 그걸 넘을 만큼 토론해가면서 뭔가를 만들어 내고, 열 시간 열한시간 토론을 해도 끝까지 따라올 수 있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 20명이 집중력 있게 간다는 그 상황이 너무 좋아서. 즐겁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정리할 수 있는 상황 아니지만, 굉장히 기뻤던 거는 진짜 작동하는 걸 만들어 냈고. 뭔가를 증명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지난 몇 년간 틀리게 해온 건 아니구나. 우리가 만들려던 걸 만들었구나. 막상 이 다음은 전혀 안 보여요. 그저 재밌는 걸 만드는데 까지는 성공한 거 같아요. 지난 며칠간 참여 작가로 돈을 꽤 벌었지만, 서브 잡으로 돈 버는 것에 이미 너무 익숙해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런 행사로 자립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어요. 자립과 관련한 이슈로 출발했지만, 이걸로는 불가능합니다. 지루한 적은 거의 없었어요.

김영수 : 교역소 첫 이벤트 끝나고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거든요. 끝난 지 한 이틀 만에 받아서. 그때도 거의 아무런 말도 못 했고, 지금도 거의 아무런 말도 못 할 거 같은데요. 이게 사실 전체적으로 읽히지 않아서요. 아직까진. 잘 모르겠지만. 저는 어떤 판매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을 했었던 것 같고. 소비되는 거와 유통되는 거의 다른 점을 고민했었던 것 같고. 저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런 이유에서 보드게임을 만들기도 하는 사람인데요. 저는 사실 이거 하기 전에 보드게임을 거의 다 해서, 퍼블리싱을 하기 직전이었어요. 번역해서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걸 포기하고 이걸 계속 준비를 했거든요. 그게 뭘까 생각했을 때, 미술로서 유통이 되는 거를 한 번쯤 보고 싶었던 것 같고, 물론 좀 본 것 같아요. 어느 정도 본 것 같지만, 이게 그렇다고 지속할 거냐고 말하면 아니었던 것 같고. 그런 점은 계속 여전히 아쉽지만, 한 번의 불꽃이나마 봤던 건 꽤 감동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돈선필 : 원동력이라면 개인적 차원에선 원동력이 제로여서 아무것도 없습니다. 윤향로 작가가 한 달 전에 저한테 짤방 같은 걸 보냈었는데, 산책하기 싫어서 목줄에 질질 끌려가는 시바견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그것도 사실이고. 동료 작가인 박현정과 제가 지내는 시간이 많으니까, 제가 얼마나 이걸 하기 싫어했는지 잘 알 거예요. 어르고 달래서 결국 여기 앉아있는 것도 저고. 신기했던 건, 기금을 신청할 때가 4월? 5월쯤이었는데, 저도 그때까지 이걸 할 줄은 몰랐고. 설마 되겠어 했었는데 진짜로 사람들이 따 오고. 심지어 공모 피티할 때에 전 가지도 않았어요. 이거 자체가 거의 뭐 기획팀이 30명 이상. 작가 합치면 100명 되는 사람이 모이는 거니까. 그냥 어떻게 굴러가고 일이 만들어지고 해서 진행이 되는 걸 보면. 아 신기하다. 제삼자 시선으로 봤던 것 같아요. 지금도 놀랍고. 끝나가는 이 시점에도 놀랍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고. 제 개인적으로는 진짜 원동력이 없어서, 지금 같이 일하고 계신 분들은 굿-즈 끝나면 한 반년 동안은 꼴도 보기 싫고 이런데, 그런 것들이 좀 신기하고. 다른 기관이나 이런 데서 촬영도 오시고, 제가 바지사장 같은 거니까, 제게 내년 계획 등을 물어보시는데, 절대 내년이란 건 없습니다. 여러분. ‘2016년 굿-즈’ 이런 건 존재하지 않고, 지금 보는 것은 약간 환상이나 꿈 같은? 신기루 같은 거다···. 마지막 날을 눈에 잘 담아두시고. 진짜 두 번 다시 없을 거 같은. 진짜 없을 거 같은. 굿-즈 처음 시작할 때도 제가 말을 꺼내서 이러고 있는 건데, 왜 이런 게 없을까? 생각하면서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던 게 분명히 있어요. 왜 아무도 안 하지? 근데 하면서 깨닫는 거죠. 아···. 30여 명의 기획팀 인원이 자신의 삶을 1년 동안 갈아서 만든 행사라서. 아 기획 자체론 절대 좋은 기획 아니고 이건. 좋은 기획이 되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우린 5일 동안의 꿈을 꿨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호상근 : 저는 기획팀이 아니고, 참여 작가일 때 원동력이라고 하면. 이분들 개인적으로도 자주 연락하는 분들이고, 소식 듣고 그래서, 기획하는 도중에 엄청 힘들었다는 이야기 한참 많이 들었어요. 영수가 게임 만들던 것 포기했다는 이야기도 듣고, 너무 막 마음이. 잘 기억할 겁니다. 잘 기억해야 할 사람들인 것 같아요. 미안한 마음에 더 열심히 한 것도 있고요. 다들 그런 마음으로 화이팅 하는 느낌으로 한 것도 있고, 언제 이런 걸 또 해보겠어요.

윤원화 : 호상근 작가를 너무 잘 불러온 것 같죠. 그러면 지금 시간이 늦어서, 저희가 준비한 토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시간이 다 늦어서 다들 죽어가고 있는데, 관객 여러분들 오신 분 중에서, 뭔가 질문 하시고 싶은 게 있거나, 아니면 여기 참여하신 분들도 많이 앉아 계신 것 같은데, 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거나, 마이크를 쥐고픈 분 두 세분 정도 받겠습니다. 질문 있으세요?

(침묵)

여기서 접을까요? 그럼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밤늦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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